눈을 떴을 때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따스한 노을빛이 스며드는 조이빌리지의 할아버지 오두막이었다. 꿈결에 맡았던 차가운 눈의 냄새와, 방금 전 내 두 손에 깃든 마법의 잔여감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나는 동화책 마지막 페이지에 찍혀 있던 낡은 인장을 단서로 삼아 마을 중앙에 위치한 오래된 도서관으로 향했다. 먼지 쌓인 거대한 서가 사이로 들어서자,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오셨군요. 은빛 열쇠가 이끌어온 문장을 따라, 당신은 결국 차원을 넘는 서사를 목격하셨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반긴 남자는 ‘션’이었다. 그는 마치 달빛을 녹여 만든 듯한 은발을 단정하게 가다듬고 있었다. 금색 장식이 정교하게 수놓아진 우아한 흰색 예복 위에 묵직한 코트를 걸친 모습은 마치 신화 속의 대사제 같았다. 그의 품에는 태양 문양이 새겨진 신비로운 검은 책이 소중하게 안겨 있었다.
반면, 옆에 서 있던 ‘댄’은 션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보랏빛이 감도는 어두운 파란색 머리카락을 짧게 친 그는 션과 비슷한 흰색 정장을 입었지만,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 근육은 위협적이었다.
“서론이 너무 길어, 션. 효율적으로 말해. 이제 저 녀석이 그 노인네의 자리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댄이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쏘아보며 사무적이고 냉정하게 내뱉었다. 노인네라면 할아버지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할아버지의 뒤를 잇는다는 게 무슨 뜻이죠? 스토리키퍼라는 게 대체 뭡니까?”
션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당신은 이야기 바깥에서 온 이방인. 정해진 결말을 바꾸고 망가진 세계를 수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오랜 시간 이 도서관에서 그 임무를 수행하셨죠. 이제 당신이 그 힘을 증명할 차례입니다.”
션은 내게 푸른 보석이 박힌 새로운 책 한 권을 쥐여주었다. 표지에는 ‘달빛을 잃은 호수’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책을 펼치는 순간, 윈터캠프 때처럼 시야가 일그러지며 칠흑 같은 밤의 호수로 빨려 들어갔다. 수면 위에는 은은한 달빛조차 잃어버린 채 가늘게 떨고 있는 소녀, 달빛 정령 ‘레이나’가 보였다.
“누구야? 오지 마. 보다시피 내 달빛을 도둑맞아서 기분 참 더럽거든. 아… 진짜 짜증 나네.”
그녀는 달빛을 닮은 은백색 머릿결을 발목까지 길게 늘어뜨린 채, 순백의 기모노 스타일 유카타에 회색 오비를 정갈하게 두르고 차가운 호수 위를 맨발로 부유하고 있었다. 톡 쏘아붙이는 반말 속에는 정령 특유의 오만함과 상실감이 묻어났다.
“걱정 마, 레이나. 내가 네 달빛을 찾아줄게.”
내가 침착하게 대답하던 바로 그때, 호수 주변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들이 솟아났다. 일반적인 늑대가 아니었다. 은회색과 흰색 털이 온몸을 뒤덮은 거대한 야수, 웨어울프 ‘세바스찬’이었다.
“크르르… 달빛 없는 호수에 이방인이 발을 들이다니. 여기서 죽고 싶은 건가?”
거대한 늑대의 털과 풍성한 꼬리, 날카로운 발톱이 돋보이는 수인의 형태. 그 존재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세바스찬이 거대한 발톱을 휘두르며 나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윈터캠프에서 정령들에게 받았던 힘을 떠올리며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파이어 볼트!!”
내 오른손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화염 덩어리가 밤하늘을 가르며 세바스찬의 가슴팍에 정면으로 적중했다.
“크아악!”
화염에 털이 그을린 세바스찬이 주춤하는 사이, 나는 지체 없이 왼손에 차가운 기운을 모아 던졌다.
“아이스 볼트!”
날카로운 얼음 창이 세바스찬의 발밑을 꿰뚫어 바닥에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생애 처음 써보는 마법이었지만,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강력한 마법의 연계 공격에 당황한 세바스찬은 결국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둠 속으로 도망쳐버렸다.
그가 흘리고 간 자리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달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주워 레이나에게 건넸지만, 호수는 여전히 탁했다. 레이나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이것만으론 어림도 없어. 달빛을 완전히 정화하려면 조이빌리지에서 피어나는 ‘루나플라워’가 필요해. 그것도 열 송이나. 내놔봐, 있으면.”
나는 다시 책 밖으로 빠져나와 조이빌리지로 향했다. 마을의 식물학자 아이비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자, 그녀는 온실에서 정성껏 키운 루나플라워를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부족한 마력은 윈터캠프의 미아를 다시 찾아가 부탁했다. 미아는 오늘도 파란색 멜빵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기꺼이 맑은 얼음의 정수를 보태주었다.
루나플라워와 미아의 정수를 품고 다시 달빛 호수로 돌아간 나는, 레이나의 호수 위로 기운을 흩뿌렸다.
순간, 호수 전체가 눈부신 은빛으로 빛나며 원래의 맑고 투명한 아름다움을 되찾았다. 그제야 레이나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뭐, 나쁘지 않네. 네 마법 솜씨도 꽤 쓸만했고. 고마워, 스토리키퍼. 이제 가봐.”
도서관으로 돌아오자, 션이 책을 덮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의 흰색 코트 자락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아름다운 결말이군요. 당신의 따스한 마음과 강인한 힘이 망가진 서사를 다시 활기차게 만들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운다는 것. 그리고 이 기묘한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는 스토리키퍼의 역할. 나는 아직 풀리지 않은 무수한 의문들을 가슴에 품은 채, 션이 건네는 다음 책의 페이지를 넘길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