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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이야기의 시작, 그리고 남겨진 따스함

어떤 이야기들은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흔들리는 시외버스의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고 그 낡은 문장들을 천천히 되새겼다. 내 손에 쥐어진 것은 한 통의 낡은 편지와, 끄트머리가 닳아빠진 은빛 열쇠 하나뿐이었다.

‘당분간 이 농장을 네게 맡기마.’

평소에도 자주 훌쩍 여행을 떠나시던 할아버지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어디로 가는지 기약도 없이, 이 짧은 편지와 열쇠만을 남긴 채 말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평범한 시골 노인이 아니었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 그는 언제나 세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고 묵묵히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던 수수께끼 같은 거목이었다.

“손님, 종점입니다.”

운전기사의 무심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뜨렸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버스 요금을 지불한 뒤, 삐걱거리는 문을 지나 밖으로 나섰다.

버스 문이 등 뒤로 닫히고 멀어져 가는 순간, 나는 내 두 발이 딛고 있는 이 낯선 땅의 질감을 체감했다.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시골 바닷가 마을, ‘조이빌리지(Joivillage)’. 그곳의 공기는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당신은 조이빌리지(Joivillage)에 진입하셨습니다.] [새로운 거주자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색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환각이 아니었다.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정류장 근처에서 짐을 내리던 마을 사람들은 내 앞의 허공에 떠 있는 이 선명한 글씨를 전혀 보지 못하는 듯했다. 오직 내 눈에만 보이는, 불가사의한 메시지 창이었다.

나는 당혹감을 감추며 조심스레 메시지 창을 손으로 저어보았다. 손끝에 닿는 감각은 없었지만, 잠시 후 메시지는 안개처럼 스르르 흩어지며 사라졌다.

‘이게 도대체 뭐지?’

의문을 뒤로한 채, 나는 손에 쥔 은빛 열쇠의 감각을 확인하며 천천히 마을로 걸음을 내디뎠다.

조이빌리지는 소박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길가에는 무릎 높이까지 자라난 이름 모를 들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낮은 돌담과 붉거나 푸른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밭에서 괭이질을 하거나 수레에 땔감을 싣는 등 저마다의 일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내가 이방인으로서 그들의 영역에 들어섰음에도, 그들의 눈빛에는 경계심이 없었다. 오히려 따뜻한 호기심과 가벼운 눈인사가 돌아왔다.

“혹시, 저 위쪽 언덕 농장을 물려받으신 손주 분이신가요?”

길을 걷던 중, 단정한 차림새를 한 젊은 남성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네, 맞습니다. 오늘 막 도착했습니다.”

“아, 역시 그렇군요!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이 조이빌리지의 촌장을 맡고 있는 레온이라고 합니다. 눈매가 할아버지를 정말 많이 닮으셨네요.”

레온은 반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참 좋은 분이셨는데 갑자기 훌쩍 여행을 떠나셔서 저희도 어찌나 서운하던지…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참, 농장 일을 처음 시작하신다면 마을의 다리우스 씨를 먼저 찾아가 보는 게 좋을 겁니다. 기초적인 농사일에 대해 잘 알려줄 테니까요.”

레온의 조언에 따라 나는 발걸음을 돌려 마을 상점가로 향했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다리우스의 원예점이었다.

“오! 네가 그 할아버지의 손주구나! 정말 환영해!”

활기차고 쾌활한 목소리로 나를 반겨준 다리우스는 마을의 정원사로, 다양한 작물과 씨앗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는 초보자를 위한 괭이질과 물뿌리개 사용법을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씨앗 몇 개를 쥐여줄 때, 그의 옆에서 조그마한 체구의 여성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아, 안녕… 하세요. 저는 노라라고 해요… 요리를… 하고 있어요.”

수줍음이 많은 요리사 노라는 뺨을 붉히며 작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부드러운 인사에 다리우스는 껄껄 웃으며 나를 다음 장소로 등 떠밀었다.

“자, 농사의 기본을 알았으니 이제 도구와 가구를 다루는 법도 알아야지! 가구점의 피오나를 찾아가 봐!”

다리우스의 말대로 나는 가구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나무판자를 가뿐히 들어 올리는 활기찬 여성, 피오나와 묵묵히 모루를 두드리고 있는 대장장이 퍼거스가 있었다.

“안녕! 뉴비로구나! 마침 잘 왔어. 가구 제작의 기본은 튼튼한 목재지. 저기 숲에 가서 나무를 좀 채집해 올래?”

피오나의 부탁으로 나는 마을 근처 숲에서 간단한 나무 채집을 마쳤다. 도끼질이 서툴러 손바닥이 얼얼했지만, 피오나는 내 목재를 보고 흡족해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녀는 내친김에 광산으로 가보라며 길을 알려주었다.

마을 안쪽의 어둑한 광산 입구에는 광부 레이모어가 곡괭이를 어깨에 걸친 채 서 있었다.

“오? 이 깊은곳까지 누구지?”

어딘가 시적인, 혹은 기묘한 말투를 쓰는 레이모어는 묘한 매력이 있는 청년이었다.

광산을 나오자 이번에는 사냥꾼 제이드와 마주쳤다. 차갑고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제이드는 다짜고짜 내게 검을 내밀었다.

“규칙은 규칙이지. 네 몫은 네가 챙겨라. 토끼를 사냥해서 가죽 3개만 가져와 봐.”

제이드의 무뚝뚝한 의뢰에 나는 한참을 들판에서 뛰어다녀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토끼 가죽 3개를 건네자, 제이드는 짧게 코웃음을 치며 사냥의 기본 요령을 짤막하게 던져주었다.

숨을 돌릴 겸 마을 외곽의 바닷가로 향했다.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부는 그곳에는 낚싯대를 쥔 채 콧노래를 부르는 에리카가 있었다.

“헤이! 낚시 안 하고 뭐 해? 낚싯대 잡는 법부터 알려줄까?”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에리카의 지도를 받으며 나는 잠시 바닷가에 앉아 평화로운 낚시의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 에리카가 물고기를 건져 올리며 불쑥 말했다.

“아 참, 아까 촌장 레온이 널 찾던데? 마을 회관으로 한 번 가봐.”

에리카의 말에 나는 서둘러 낚싯대를 거두고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회관 안에는 단정한 모습의 레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마침 잘 오셨습니다.”

레온은 서랍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묵직하고 낡은 가죽 장정의 책이었다. 놀랍게도 책등에는 견고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이것은…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물건입니다. 손주분이 오시면 반드시 이 책을 건네달라고 신신당부하셨죠. 저희도 열어보려 했지만, 무슨 수를 써도 이 자물쇠는 열리지 않더군요.”

레온이 내민 잠긴 이야기책. 자물쇠의 독특한 형태를 유심히 살펴보던 나는, 문득 뇌리를 스치는 기억에 눈을 크게 떴다. 아까 오두막에 짐을 풀고 집안을 둘러볼 때, 창고 구석에서 보았던 낡은 열쇠가 떠오른 것이다. 할아버지의 오두막 열쇠와 아주 비슷하게 생겼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던 그 열쇠.

“촌장님, 감사합니다. 이 책, 왠지 열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책을 품에 안고 서둘러 할아버지의 오두막으로 달려갔다. 창고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그 열쇠를 찾아 떨리는 손으로 자물쇠의 홈에 밀어 넣었다. 천천히 손목을 돌리자, ‘찰칵’ 하는 맑은 금속음과 함께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책이 마침내 입을 벌렸다.

낡은 종이 냄새와 함께 눈앞에 펼쳐진 첫 페이지.

지도에도 없는 이 작은 마을 조이빌리지에서의 나의 진정한 이야기가, 지금 막을 올리고 있었다.